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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카테고리 없음2016. 10. 24. 16:19

   

블랙홀

(black hole)의 존재는 현대천문학과 물리학의 이론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대천문학의 별 진화이론과 현대물리학의 일반상대성이론은 블랙홀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현대천문학과 물리학의 상징, 블랙홀.

   

인정받지 못한 '블랙홀'의 존재

질량이 있는 모든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작용한다. 특히 지구가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을 중력이라고 하는데, 이 중력 때문에 인간은 공중에 떠다니지 않고 지표면에서 생활할 수 있다.

   

만일 지구에서 중력보다 더 큰 속도로 물체를 던지면 어떻게 될까? 초속 11.2km의 속도보다 빠르게 물체를 던지면 지구를 탈출할 수 있다. 따라서 초속 11.2km를 지구 탈출속도라고 부른다. 물론 지구보다 더 강한 표면중력을 갖는 목성의 탈출속도는 초속 59.5km이다. 여기서 중력이 이들보다 엄청나게 강한 천체가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 천체의 탈출속도는 어떻게 될까? 마침내 광속, 즉 초속 30만km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광속보다 큰 탈출속도를 갖는 천체가 존재한다면,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공상과 같은 이런 아이디어 하나에서 블랙홀이 탄생했다.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는 블랙홀.

   

1915년, 독일의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은 중력에 의해 공간이 휜다는 일반상대성이론

을 발표했다. 상대성이론의 핵심인 중력장 방정식은 빛이 휘어야 성립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력장 방정식은 물리학의 역사에서 가장 어려운 방정식 중 하나로 꼽히며, 이를 완전히 풀어낼 수 있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른 1916년에 독일의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칼 슈바르츠실트(Karl Schwarzschild)가 회전하지 않는 천체의 경우 해당되는 중력장방정식의 답을 구했다. 그 답에 따르면 태양 바로 주위에서는 중력 때문에 빛이 약 2″(1°= 60′= 3600″)의 각도만큼 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이 결과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1919년, 영국의 천문학자 아서 에딩턴(Arthur Eddington)이 아프리카에서 일어난 개기일식을 이용해 빛이 휜다는 사실을 관측해내자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블랙홀, '미운 오리 새끼' 에서 '백조'로 변신

천체망원경 제작 기술의 발달로 중성자별

이 발견되면서, 마침내 블랙홀에 대한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의 태도는 돌변하게 된다. 태양 정도의 질량을 갖는 중성자별의 크기는 대략 한국의 수도인 서울시만하다. 이런 중성자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이 발견된 이상, 그 보다 조금 더 수축한 블랙홀의 존재를 의심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를 계기로 블랙홀에 대한 연구가 1950년대~1960년대에 걸쳐 다시 불붙기 시작했고, 이로써 블랙홀의 존재는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로 화려한 변신을 하게 된다.

특히 뉴질랜드의 수학자 로이 커(Roy Kerr)가 1963년, 회전하는 구대칭의 천체에 적용되는 중력장 방정식의 답을 구해 블랙홀 연구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회전하지 않는 슈바르츠실트 풀이를 구한 지 약 50년이 지나서야 '커 풀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천문학에서 슈바르츠실트 블랙홀, 커 블랙홀이라는 용어가 생겼는데, 이 말은 각각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 회전하는 블랙홀을 의미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결과는, 같은 질량을 갖는다면 슈바르츠실트 블랙홀보다 커 블랙홀의 크기가 최고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사실이었다. 즉, 태양의 경우 블랙홀이 돼 최대한 빨리 자전하면 반지름이 1.5km가 된다는 뜻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영국의 벨(Bell)이 1968년 전파 관측 도중 매우 규칙적이고 주기가 약 1초에 불과한 전파의 박동을 발견했다. 그 당시까지 알려진 어떠한 천체도 이렇게 짧은 주기의 관측 자료를 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 발견은 곧 천문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됐다. 심지어 처음에는 외계의 문명에서 날아오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었는데, 천문학자들은 이러한 전파원을 펄서(펄사, pulsar)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펄사의 정체는 곧 빨리 회전하는 중성자별로 밝혀졌다. 이를 통해 중성자별의 입지도 더욱 확고해졌다.

   

블랙홀 상상도.

   

비로소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얻다

마침내 1969년, 미국의 조 휠러(John Archibald Wheeler)는 블랙홀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믿겨지지 않는 일이지만, 사실 이전에는 '블랙홀'이란 이름조차 없었다. 그 대신 '얼어붙은 별', '붕괴한 별' 등의 이상한 이름으로 불려온 것이다. 그리고 블랙홀은 '빛까지 빨아들이는 지옥' 또는 '시공간의 무서운 구멍' 등으로 불리며 모든 것을 남으로부터 빼앗기만 하는 '놀부' 같은 이미지를 굳히게 됐다.

그런데 영국의 스티븐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 박사가 블랙홀에 대한 개념을 모조리 바꿔놓았다. 호킹은 블랙홀이 '흥부'처럼 남에게 베푸는 착한 성격도 지니고 있어서, 무궁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탱크로 간주돼도 무방함을 증명했다. 호킹은 이를 '블랙홀은 그다지 검지 않다(Black holes ain't so black)' 같이 표현했고 1973년, '블랙홀은 검은 것이 아니라 빛보다 빠른 속도의 입자를 방출하며 뜨거운 물체처럼 빛을 발한다'는 학설

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다. 호킹이 주장한 이론에 따르면, 빅뱅 직후 현미경으로도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블랙홀이 무수히 태어나야만 한다. 이런 블랙홀을 '원시 블랙홀'이라고 부는데, 원시 블랙홀의 질량은 10만 분의 1g보다 크면 된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원시 블랙홀의 최대 질량은 태양 질량 정도이므로, 크기는 대체로 아주 작다. 이러한 원시 블랙홀이 일반 천체와 같이 초속 수백km의 속도로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면, 웬만해서는 다른 천체들에게 중력으로 포획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천체와 충돌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양성자만한 블랙홀이 지구에 충돌하면 혜성이나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피해를 줄 수 있다.

회전하지 않는 블랙홀과 회전하는 블랙홀.

   

블랙홀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

현대의 거대한 천체망원경들이 개발되면서 여러 은하 중심 부분에서 태양보다 수억 배 더 무거운 블랙홀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실제로 이들은 크기가 태양계만하고, 태양과 같은 별 1천억 개정도가 낼 수 있는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이렇듯, 이제는 '과연 블랙홀은 존재 하는가'라고 물을 때가 아니라 '블랙홀은 몇 종류나 있는가' 물을 때인 것이다.

또한, 블랙홀은 SF(과학소설, Science Fiction) 작가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줬다. 오늘날 우주를 배경으로 한 SF소설이나 영화들 중에, 블랙홀을 통한 시공간 여행을 빌리지 않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한 블랙홀이 다른 우주에 있는 블랙홀과 이어질 수만 있다면 우주여행을 하는데 지름길 노릇을 할 수 있다.

   

웜홀 우주선 상상도.

   

이것은 마치 사과 속의 벌레구멍과 같아서 사과의 한 쪽 표면에서 다른 쪽 표면으로 벌레가 가는데 시간을 절약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어진 두 블랙홀을 실제로 '웜홀(worm hole, 벌레구멍)'이라고 부른다. 뉴턴이 떨어지는 사과를 얻어맞았다는 이야기 때문에 상대성이론을 전공하는 과학자들이 이제껏 사과를 많이 인용해 왔지만, 드디어 사과 속의 벌레가 만든 구멍까지 학술용어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웜홀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한쪽 블랙홀 속으로 들어가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다른 쪽 블랙홀에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 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쪽 출구도 무엇이든지 다 집어삼키는 블랙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는 무엇이든지 내놓기만 하는 '화이트홀(white hole)'이 출구에 있어야만 했다. 블랙홀과 화이트홀이 양쪽의 입구와 출구를 각각 맡는 웜홀은 이상적인 우주여행의 지름길이다. 화이트홀은 한동안 우리의 희망 사항으로 남아있을 듯 했다. 하지만 최근에 호킹이 제기한 작은 블랙홀은 화이트홀과 다름이 없다는 주장은 과학적인 입지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블랙홀은 앞으로도 21세기 천문학과 물리학의 상징적 위치를 누릴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 인류가 블랙홀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 블랙홀
    별이 극단적인 수축을 일으켜 밀도가 매우 증가하고 중력이 굉장히 커진 천체를 말한다.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를 둔 것으로, 물질이 극단적으로 수축하면 그 안의 중력은 빛, 에너지, 물질, 입자의 어느 것도 탈출하지 못할 만큼 강해진다.
  • 일반상대성이론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1915년에 발표한, 중력을 상대론적으로 다루는 물리 이론이다. 특수상대성이론이 '시간+공간'의 이론이라면 일반상대성이론은 '시간+공간+중력'에 관한 이론이다. 이 이론은 질량이 시공간을 휘게 해 중력장이 형성된다고 기술하는 중력장 방정식의 하나로 집약된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력을 다루는 이론 가운데 가장 정확하게 실험적으로 검증됐다.
  • 중성자별
    중성자만으로 구성된 별. 원자가 굉장한 압력을 받게 되면 전자가 양성자로 들어가 버리게 된다. 그렇게 되면 전기적으로 중성인 중성자가 된다. 중성자별이 그 고압의 중력에서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중성자 간의 반발력인 '축퇴압' 때문이다. 중성자별은 축퇴압이 중력과 균형 잡혀있는 초고밀도의 별이다. 중력이 축퇴압을 넘어 버리면 한없이 찌그러져 블랙홀이 된다.
  • 스티븐 호킹의 학설
    물체가 블랙홀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빛보다 빠른 속도가 필요한데, 이런 일은 보통 물체에는 불가능하다. 스티븐 호킹은 이러한 종래의 학설을 뒤집어,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이 입자를 방출한다는 내용의 학설을 발표했다.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 바로 바깥쪽 진공에서는 양자요동을 통해 입자와 반입자가 생성되는데, 이중 반입자는 블랙홀의 사건 지평선으로 떨어지고, 입자는 외부로 방출된다는 것이다. 이때 블랙홀로부터 방출되는 열복사를 호킹 복사라고 한다.

    박석재 / 한국천문연구원장

       

    원본 위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20&path=|453|491|&leafId=651>

Hubble

지구별 이야기2016. 10. 24. 16:12

   

허블우주망원경(Hubble Space Telescope)은 미항공우주국(NASA)이 우주왕복선을 이용해 1990년 4월 지구 궤도에 올려 놓은, 천체 관측을 위한 망원경이다. 20세기 초, 은하와 우주 팽창의 발견으로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연 미국의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Edwin Powell Hubble)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지구 상공 610km에서 지구 주위를 돌면서 천체의 측광관측

분광관측

을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된 허블우주망원경은 궤도에 오른 지 20년이 지난 2011년 현재까지도 우주 탐사에 앞장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있다.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다. 허블 우주 망원경.

   

허블우주망원경이 완성되기 전, 천문학자들은 '우리가 지금 모르고 있는 모든 문제는 허블우주망원경이 우주로 올라가기만 하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라며 허블우주망원경에 무한한 기대를 가졌었다. 실제로 허블우주망원경은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새로운 사실들을 밝혀냈다. 그 가운데 우주의 나이를 10% 오차로 알 수 있게 된 것이나 우주가 암흑에너지로 꽉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모두 허블우주망원경의 큰 공로라 할 수 있다. 그야말로 우주론을 새로 정립한 셈이다. 또한 최근에는 태양계 밖에 있는 외계 행성을 관측하고, 이들 행성에서 생명체의 흔적을 찾는 관측을 수행함으로써 21세기 천문학의 중요한 분야가 될 천체생물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스피처, 우주망원경을 구상하다

허블우주망원경에 대한 최초의 구상은 1946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이론천체물리학자인 라이먼 스피처(Lyman Spitzer, 1914~1997) 교수에 의해 이루어 졌다.

   

스피처는 성간물질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업적을 낸 학자로, 일찍부터 우주망원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형 우주망원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우주망원경이 지상의 망원경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경비가 들어감에도 불구하고 필요한 이유에 대해 그는 "지상의 망원경에 비해 각 분해능(두 물체를 분해해서 볼 수 있는 정도를 각도로 표현한 것)이 뛰어나 멀리 있는 천체의 식별이 용이하고, 지상 망원경으로는 관측이 불가능한 자외선과 적외선을 이용한 천체의 관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스피처에 의해 촉구된 우주망원경 개발은 NASA에 의해 1960년대 궤도태양관측소(OSO)와 궤도천체관측소(OAO) 건설을 거쳐, 1968년에 지름 3m의 우주 반사망원경 건설 계획으로 발전했다. 우주 궤도에 올릴 반사망원경 계획은 1979년 발사를 목표로 진행됐으나, 예산 마련의 어려움 때문에 궤도에 올라가는 데까지 10년 정도 더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구경은 2.4m로 줄었고, 이름도 허블우주망원경으로 정해졌다. 또한 유럽우주항공국도 제작에 참여하는 등 전 세계의 역량을 총집결해서 만들게 됐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우선 CCD 카메라나 분광기와 같은 관측 장비와 함께 반사망원경의 거울 제작을 포함한 광학계를 만들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싣고 연료를 공급하고 지상과 교신을 할 우주선 부분의 제작도 함께 이뤄져야 했다. 때문에 허블 우주망원경의 제작에는 몇몇 미국 정부 산하 기관들 뿐 아니라 퍼킨 엘머나 코닥과 같은 광학회사도 참여했다. 이렇듯 허블우주망원경의 제작은 미국 우주개발 역사에서 가장 야심찬 계획 중 하나로 추진됐다.

   

스피처 우주 망원경.

   

그렇다면 허블우주망원경 계획이 그전에 이루어진 궤도태양관측소나 궤도천체관측소와 차별되는 점은 무엇일까? 다른 우주망원경들은 지구 궤도에 올려질 때 탑재한 관측 장비와 연료가 수명을 다하면 그대로 우주에 버려진다. 그 반면 허블우주망원경은 우주왕복선을 이용해 궤도에 올려진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후 관리를 받고, 계속 새로운 관측 장비가 붙여져 새로운 관측을 수행하도록 고안됐다. 이 때문에 허블우주망원경은 미국 우주 계획의 핵심 중 하나인 우주왕복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계획되고 건설됐다.(2000년 NASA는 허블우주망원경을 활용하지 않고 퇴역시킬 계획을 발표했으나, 좀더 유지하는 방향으로 계획을 수정, 2009년 5월 애틀란티소호가 다섯 번째 수리를 위해 발사되었다.)

   

1993년 허블우주망원경의 카메라를 교체하고 있는 모습.

   

1990년 지구 궤도 위에 오른 후, 허블우주망원경은 서서히 개선되어 왔다. 1993년 12월 허블우주망원경의 유지 보수를 위해 보정렌즈와 WFPC2라 불리는 광시야 행성카메라를 설치한 작업이 있었다. 미국의 CNN 방송은 이를 전 세계에 생방송으로 중계했고, 우주인이 우주 유영을 하며 허블우주망원경을 수리하는 모습을 전 인류가 지켜볼 수 있었다.

   

그 후에도 2009년 5월까지 총 네 번의 서비스 미션을 더 가져 허블우주망원경의 관측 장비들을 교체, 더 좋은 영상을 얻는 계기가 마련됐다. 가장 먼 우주의 모습을 보여준 HUDF(Hubble Ultra Deep Field)는 2002년 수행된 서비스 미션에서 교체된 탐사용 고급카메라(ACS)와 1997년 교체된 닉모스(NICMOS)를 장기 노출해 찍은 합성 영상이다.

   

허블우주망원경이 밝힌 우주의 신비

허블우주망원경이 밝힌 우주의 신비는 수없이 많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현대 우주론의 핵심적인 물리량인 허블상수를 정확하게 구했다는 것이다. 허블상수는 우주의 팽창률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 역수(어떤 수 x의 역수=1/x)는 우주의 나이에 비례한다. 우주론에 따라 허블상수와 우주의 나이 사이의 관계가 달라지지만, 어느 경우든 허블상수만 정확하게 구할 수 있다면 우주의 나이를 알 수 있다.

   

1990년, 허블우주망원경이 지구 궤도에 올려지기 전에 알려진 허블상수 값의 범위는 50~100km/s/Mpc 였는데, 이 허블상수에 해당하는 우주의 나이는 100억년이 될 수도, 혹은 200억년이 될 수도 있었다.

때문에 허블 우주망원경이 지구 궤도에 올라가자마자 수행한 가장 중요한 임무는 처녀자리 은하단에 있는 은하를 관측하고, 이로부터 이 은하의 거리를 구해 정확한 허블상수 값을 구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카네기 연구소의 웬디 프리드만(Wendy Freedman)이 연구책임자로 수행했다. 그녀의 팀은 관측에 성공해 허블상수 값을 10% 오차범위로 구할 수 있었고, 따라서 우주의 나이도 90%의 정확도로 알 수 있게 됐다. 이 자료를 통해 계산한 우주의 나이는 약 80억120억년이었다.

   

HUDF(Hubble Ultra Deep Field) 사진에 담긴 먼 은하들의 모습.

   

허블 우주망원경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발견은 1998년, 우주의 팽창 속도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즉, 현재 우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크기가 더 빠르게 커지는 가속 팽창을 하고 있다는 것으로, 멀리 있는 초신성을 독립적으로 관측한 두 팀의 천문학자들에 의해 밝혀져 우주론의 새 시대를 열었다. 기존의 이론인 표준 우주론에서는 우주가 대부분 차가운 암흑 물질로 구성돼 있다고 설명했는데, 우주의 가속 팽창은 70% 정도는 아직 정체를 모르는 암흑에너지로 이뤄져 있고 30% 정도는 암흑물질과 보통의 빛을 내는 물질로 구성돼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허블우주망원경의 전송방식.

   

이밖에도 허블우주망원경은 아주 멀리 있는 은하를 관측해 우주 초기에 만들어진 은하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은하보다 크기가 작고 모양도 불규칙한 것이 많다는 것을 보임으로써 은하 생성 과정의 이해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또한 은하의 중심부에는 태양 질량의 수 억 배에 달하는 초중량 블랙홀이 존재해, 은하의 탄생과 진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도 보여줬다.

허블우주망원경을 이용한 관측에서는 이러한 우주론적인 발견 외에, 21세기 천문학의 중요한 분야인 천체생물학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세계 최초로 외계행성인 '포말하우트B'의 가시광선 영상 관측에 성공했고, 외계행성 HD209458B를 분광관측해 수소 뿐 아니라 탄소, 산소, 나트륨 등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또한 다른 외계행성에서 물이나 메탄의 존재를 확인하기도 했다.

   

허블우주망원경이 찍은 우주의 모습.

게성운(Crab Nebula).

   

21세기 천문학 발전의 밑거름 제공

허블우주망원경이 지구 궤도에 올려진지도 벌써 20년이 지났다. 하지만 허블우주망원경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망원경으로 우주의 신비를 파헤치는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은 앞으로 차세대 우주망원경(JWST)이 우주궤도에 올려지거나, 능동광학으로 무장한 지상의 30m급 거대 망원경들이 건설돼 관측을 시작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허블우주망원경은 수많은 우주의 신비를 밝혔지만 새로운 질문도 많이 던졌다. 이 중에서 암흑물질의 정체를 밝히는 일과 함께 암흑에너지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21세기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지만, 은하의 생성 비밀을 밝히고 우주에서 태어난 최초의 천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중요한 일임은 분명하다. 이와 함께 이제 막 시작된 천체생물학도 21세기 천문학의 중요 화두이다. 21세기 천문학은 허블우주망원경의 발견을 바탕으로 우주의 신비를 향한 무한 도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 측광관측
    빛의 강도 변화를 관측하고 연성계나 변광성의 구조를 조사하는 관측
  • 분광관측
    망원경으로 모아진 빛을 파장 별로 나눠 각 파장 영역에서 나오는 결과로 천체의 여러 가지 물리 상태를 조사하는 관측

    안홍배 / 부산대 과학교육학부 교수

       

    원본 위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24&path=|453|491|&leafId=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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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I

지구별 이야기2016. 10. 24. 16:12

   

'이 우주에서 지구에만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엄청난 공간의 낭비다.' 이것은 [코스모스]의 저자인 칼 세이건(Carl Edward Sagan, 1934~1996)의 말이다. 외계지적생명체 탐사를 다룬 영화 '콘택트(Contact, 1997)'에도 소개된 바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우주 어디엔가 우리와 같은, 혹은 우리보다 더 뛰어난 문명을 갖춘 외계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SETI, 외계지적생명체탐사

   

미국의 천문학자. 칼 세이건 (Carl Edward Sagan, 1934 ~1996). 세계적 베스트셀러 [코스모스]의 저자로 유명.

   

칼 세이건의 말대로 우주는 너무나 넓고 우주에는 너무나 많은 별이 존재한다. 태양계가 속해있는 우리은하에는 태양과 같이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이 최소 천억 개가 있다. 만약 별을 1초에 하나씩 센다면 약 3,200년이 걸리는 엄청난 숫자다. 또한 이같이 엄청난 별을 가진 우리은하와 같은 은하가 또 천억 개가 있다. 이 별들에 딸려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의 숫자까지 고려해보면 우주의 지적생명체가 지구에만 존재한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 불합리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70년 이상 동안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을 우주로 보내고 있다. 이 신호들은 빛의 속도로 우주로 나아간다. 지구에서 70광년 이내의 거리에 충분히 강력한 전파망원경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의 오래된 TV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100년이 지나면 우리의 신호들은 170광년까지 가게 된다. 수십만 년이 지나면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우리은하에 있는 모든 존재가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때쯤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미 우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겨놓은 것이다.

   

우리와 유사한 문명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들에게도 과학이 있을 것이고,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칙들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들도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만들었을 것이고 원거리 통신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존재를 외부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외계지적생명체탐사(SETI, Search for Extra Terrestrial Intelligence)는 바로 이런 흔적을 찾는 것이다.

외계지적생명체탐사의 방법

   

외계지적생명체탐사(SETI) 소개 동영상 <출처: 국립과천과학관>

   

SETI 연구자들은 가끔 다른 종류의 망원경을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로 전파망원경으로 외계 생명체가 우주로 보내었을 수 있는 신호들을 찾고 있다. 1960년 프랭크 드레이크(Frank Drake)가 가까이 있는 두 개의 별 주변에서 오는 신호를 찾는 시도를 한 것이 공식적인 SETI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외계신호 탐사는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큰 전파망원경을 사용할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고, 정부가 SETI에 예산을 투입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민간 기부자들이 등장하여 SETI 과학자들은 지금 외계에서 오는 신호를 찾는 일만을 수행하는 전파망원경을 건설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에 많은 돈을 기부한 폴 앨런(빌 게이츠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를 공동 창업한 사람)의 이름을 딴 '앨런 배열 망원경(Allen Telescope Array)'이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는 이미 일부 가동을 시작했다. 모두 완성이 되면 앨런 배열 망원경은 350개의 전파망원경이 동시에 외계 신호를 찾게 될 것이다.

앨런 배열 망원경은 외계 신호를 찾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것이다. SETI 과학자들은 앞으로 20년에서 30년 이내에는 외계지적생명체가 보내는 신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이 믿음의 근거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성공할 확률을 계산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확률은 0이다.

   

SETI에서 찾는 것은 외계생명체가 의도적으로 보내는 신호

앨런 배열 망원경이 외계 신호를 찾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키긴 하겠지만 아직 우리의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 사실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TV나 라디오 신호가 가장 가까운 별에서 오고 있다 하더라도 받을 수가 없다. 신호가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SETI에서 찾는 것은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의도적으로 보내고 있는 강한 신호이다. 다시 말하면 현재로서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싶어 하는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들 역시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신호를 보내기도 했을 것이라는 가정이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우리도 역시 그런 신호를 보낸 적이 있기 때문이다. 1974년, 과학자들은 지름 300m의 아레시보 전파 망원경에 있는 강력한 레이더 송신기를 이용하여 구상성단 M13을 향해서 3분간 신호를 보냈다. 이 성단에는 수십만 개의 별이 있으므로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방향으로 전파망원경을 겨냥한다면 우리가 보낸 신호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M13은 21,000광년 떨어진 곳에 있으므로 신호가 도착하기까지 21,000년이 걸리고 지구로 답장이 오는데 다시 21,000년이 걸린다. 신호를 서로 주고받기는 어렵겠지만 만일 먼 미래의 누군가가 우리의 신호를 받는다면 그들에게는 우주에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외계지적생명체탐사

   

SETI 프로젝트는 1992년에 NASA에서 공식 프로그램으로 진행한 적이 있지만 의회의 반대로 1년 만에 취소되었다. 그만큼 정부의 지원으로 진행되기는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후 해외에서는 민간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비교적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 개관한 국립과천과학관에 설치된 지름 7m 전파망원경을 이용하여 교육 목적으로 SETI 관측을 시작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2009년 한국천문연구원에서 서울, 울산, 제주에 있는 지름 21m 전파망원경을 이용한 '세티 코리아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SETI는 UFO 연구?

많은 사람들이 외계생명체라고 하면 흔히 UFO를 떠올린다. 그러나 UFO가 외계생명체의 비행체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태양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별까지의 거리는 약 4.2광년으로 빛의 속도로도 4년이 넘게 걸리고, 현재 우리의 기술로는 7만 년 이상이 걸리는 거리다. 그 정도 이상의 거리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수준의 생명체라면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형태의 비행물체를 이용하지도 않을 것이고, 실수로 흔적을 남길 가능성도 거의 없다. 특히 외계 생명체의 비행체가 추락을 하거나 인간을 납치하여 생체 실험을 할 가능성은 더더욱 낮다.

   

국립과천과학관에 설치된 지름 7m 전파망원경.

   

다양한 형태의 외계생명체 연구

어떻게 보면 외계지적생명체탐사라는 일은 너무 막연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우주탐사의 많은 부분은 다양한 형태로 외계생명체의 존재 가능성을 연구하는 것이고 외계지적생명체탐사는 그 다양한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실제로 외계생명체를 찾는 일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과학자들은 SETI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는 몇 명뿐이다.

행성 과학자들은 태양계 천체들을 관측하거나 무인 탐사선을 보낸다. 그들은 생명체 존재의 직접적인 증거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현재는 그곳의 환경을 연구하여 그곳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지 연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주생물학을 연구하는 많은 과학자들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 그리고 지구에서의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기도 한다. 지구에서 어떻게 생명체가 탄생했는지를 이해한다면 다른 곳에서도 생명체가 탄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천문학자들은 생명체가 살기에 적당한 별과 그 별의 중심을 돌고 있는 행성을 찾고,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서만 연구할 수 있는 세계에서 생명체를 찾을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이 모든 노력은 이 우주에 과연 우리밖에 없을까라는 가장 궁극적인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한 것이다. 외계생명체의 존재를 찾게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지만 아직은 아무런 확실한 증거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강환 / 국립과천과학관 전시운영과 연구사

서울대학교 천문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받고, 영국 켄트대학교에서 왕립학회 연구원으로 우주망원경 자료분석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재 국립과천과학관에서 연구사로 일하고 있으며 천체투영관과 천체관측소 등 천문분야 교육프로그램과 전시관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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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반짝이는 수많은 별은 아무런 규칙 없이 흩어져 있는 듯하다. 하지만 별을 오랫동안 관측해 보면 몇 가지 특징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항상 같은 위치에 고정돼 있는 별이 있는가 하면 해와 달, 행성들처럼 별자리 위에서 서서히 위치가 변하는 천체들도 있다. 문명이 생기면서 인류가 가장 먼저 한 과학적 활동 중 하나는 천체의 운행을 살펴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이해한 것이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인류의 조상들은 하늘을 관찰해 천체 운행이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문명이 생기면서 인류가 가장 먼저 한 과학적 활동 중 하나는 천체의 운행을 살펴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이해한 것이다. <출처: (CC) European Space Agency>

   

별자리를 보고 계절을 예측한 이집트인들

사람들은 일찍부터 계절 변화가 천체의 운행 주기와 깊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별자리 위에서 움직이는 태양의 위치를 살피면 계절의 변화를 미리 예측할 수 있음을 파악했다. 이집트인들도 초저녁 해가 진 직후 북쪽 지평선 위에 놓여진 북두칠성의 모양이나 북쪽 하늘 위로 지나가는 별자리를 보고 봄이 시작되는 것을 알아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항상 관측하던 별은 행성을 제외한 별들 중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였다. 기원전 4,000년 이전부터 사람들은 시리우스가 고대 이집트의 생명줄인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와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일강은 매년 6월 초가 되면 주기적으로 범람했다. 이 때 나일강 상류에서 흘러내리는 물과 함께 엄청난 양의 비옥한 흙이 떠 내려와 나일강 삼각주를 덮었다. 때문에 이곳에 곡식을 심으면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많은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다.

시리우스는 하루에 한 번씩 동쪽 지평선에 떠올라 서쪽으로 진다. 매일 떠오르는 시리우스가 '언제' 떠오르느냐가 계절과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시리우스가 동쪽 지평선에 나타나면 곧 나일강의 범람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다. 365일이 지나면 또 다시 똑같은 현상이 반복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밤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 시리우스의 구상도. 오른쪽의 푸른 별은 시리우스의 동반성(同伴星)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만든 달력의 원리

이처럼 고대 이집트인들은 한 달의 길이를 30일로 하고 1년의 길이를 365일로 하는 최초의 태양력을 사용했다.(이집트인들은 달을 관찰해 달의 모양이 완전히 바뀌는 주기가 약 29일 13시간 정도라는 것을 알았다. 달의 모양이 바뀌는 주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한 달의 길이 단위로 쓰였다.) 이들은 1년의 길이를 3개의 계절로 나눴다.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를 '아케트(Akhet)', 물이 빠져서 파종하는 시기를 '페레트(Peret)', 곡식이 자라고 추수하는 시기인 여름철은 '쉐무(Shemu)'라 정했다. 각 계절을 30일이 한 달 단위로 된 네 달로 배열하고 한 달은 다시 1주에 10일씩 3주로 나눠서 구성했다.

   

춘분점은 천구의 적도와 황도가 만나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과 비교하면 '아케트(Akhet)'는 '6월 15일~10월 15일 경', '페레트'는 '10월 15일~2월 15일 경', '쉐무'는 '2월 15일~6월 15경'에 해당한다. 한 계절은 4달, 1 년은 12달이며 1 년의 날짜 수는 360일이었다. 360일과는 별도로 5일은 당시 종교적 대상으로 믿던 '오시리스(Osiris)', '이시스(Isis)', '호루스(Horus)', '네프티스(Nephthys)', '세트(Seth)' 라는 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축제일로 정했다. 이와 같이 360일과 5일을 합쳐 1년의 길이를 총 365일로 정해 사용했지만 오늘날과 같이 4년마다 별도로 윤년

을 두지는 않았다. 이 때문에 달력의 1년이 시작되는 날이 4년마다 하루씩 밀려나게 돼 고왕국 말기쯤(기원전 2,081년경)에는 무려 5개월이나 밀려났다.

이때 사용하던 달력은 정확히는 태양력이 아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자. 우선 지구의 적도를 하늘에 연장해 생기는 면을 '천구

의 적도'라 하고 태양이 별자리 위를 운행하는 경로를 '황도'라 한다. 황도와 천구의 적도가 만나는 점이 두 군데 있다. 그 중 태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교차되는 점을 '춘분점'이라 한다.

   

태양이 황도 위에 있는 점에서 출발해 황도를 따라 운행하다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 지구의 공전 주기로, '1항성년'이라고 한다. 그 길이는 약 365.2564일로 365일 6시간 9분 정도다. 우리가 달력에서 사용하는 1 년의 길이는 태양이 춘분점에서 출발해 황도를 따라 운행하다가 다시 춘분점의 위치로 되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이를 '1태양년'이라 하는데 약 365.2422일로 365일 5시간 49분 정도다. 1항성년과 1태양년의 차이는 약 20분 정도로 항성년이 약간 길다(지구의 세차운동으로 태양년의 기준이 되는 춘분점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대 이집트 달력은 태양이 황도 위의 고정된 위치에서 출발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 데 걸리는 시간을 사용했다. '1항성년'을 1년으로 사용한 것이다.

율리우스역에서 현재의 달력이 되기까지

태양의 운행으로 만든 고대 이집트력은 거의 변화없이 사용됐다. 기원전 46년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년~BC 44년)는 달력을 고칠 때 고대 이집트의 태양력을 도입했다. 당시 로마가 사용하던 달력은 1태양년의 길이가 부정확한 것을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귀족들이 멋대로 달력을 운용해 1년의 길이가 67일이나 어긋나는 일까지 생겼다. 율리우스는 달력을 고칠 때 세계 학문의 중심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하던 유명한 천문학자 소시게네스(Sosigenes, ? ~ ?)에게 자문을 받았다. 그는 이집트에서 사용되던 달력을 바탕으로 만든 태양력으로 달력을 고치도록 제안했다.

율리우스는 1년의 길이를 365.25일로 하고 춘분날을 3월 23일로 정했다. 매년 춘분날이 같은 날이 되도록 만들기 위해 4년마다 2월의 날수를 하루 더해 윤년을 두었다. 이 달력을 '율리우스력'이라 하는데 기원전 46년 1월 1일부터 시행됐다.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태양력이 원조인 율리우스력은 로마를 통해 전 세계로 전파됐고, 현재의 달력인 태양력을 사용하게 된 계기가 됐다. 율리우스력은 1태양년 길이가 실제보다 11분 12초가 길기 때문에 128년이 지나면 하루의 차이가 생긴다.

   

그레고리력의 도입을 축하하는 모습을 표현한 조각.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무덤에 새겨져 있다. <출처: (CC) Rsuessbr at Wikipedia.org>

   

실제로 1582년이 됐을 때는 13일 정도의 차이가 생겨 춘분날이 3월 10일로 옮겨갔다. 당시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 13세(Gregorius XIII. 1502~1585)는 종교적 행사로 지키는 부활절의 날짜가 제정 당시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달력을 개정했다. 우선 1년의 길이를 실제의 길이와 거의 같게 365.2425일로 사용하기 위해 100년마다 윤년을 1회씩 줄여 400년간 97회의 윤년을 두었다. 또한 춘분날을 3월 10일에서 부활절 제정 당시의 날짜인 3월 21일로 돌아오게 했다. 이를 위해 1582년에는 10월 4일 다음날을 10월 15일로 정해 사용했다. 이 달력을 '그레고리력'이라 한다.

고대 달력의 변천사. 이집트력 → 율리우스력 → 그레고리력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인 태양력의 근원은 고대 이집트에서 사용하던 달력이다. 이집트인들은 처음엔 달의 운행만을 고려해 만든 달력을 사용했으나 시리우스의 움직임과 나일강의 범람 등을 관찰하며 태양력을 쓰게 됐다. 이때 만들어진 태양력이 율리우스력에서 그레고리력으로 두 번에 걸쳐 개정되며 지금의 달력에 이르게 됐다. 지금의 태양력은 이집트인들이 나일강의 주기적인 범람과 시리우스의 이동을 관찰해 얻어낸 과학의 산물인 것이다.

  • 윤년
    역법과 실제 우주년 또는 계절년을 맞추기 위해 여분의 하루, 주, 또는 달을 끼우는 해.
  • 천구
    천체를 관측하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늘에 무한대의 구면을 설정해서 만든 가상의 하늘.

    이용복 / 서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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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하는 별자리는 수천 년 전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돼 그리스를 거치면서 동물, 신화 속 인물과 동물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서구 별자리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대 동양에서도 자체적으로 별자리를 만들어 사용했다. 동양 고대 별자리는 중국 등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체계를 갖추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형태의 천문도가 제작됐다.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 천문도, 소주천문도.

   

돌에 새긴 천문도, 소주천문도

중국 소주(蘇州)시 문묘(공자묘)에는 남송시대(1127~1279)의 귀중본 비각

이 전시돼 있다. 네 개의 비각 중에서 현재 '천문도'와 '지리도', '제왕소운도' 세 개만이 전해지고 있는데 지리도 아래 이 비각들을 만든 시기와 유래가 적혀있다. 지리도 아래에는 원래 1190년 황상(黃裳)이 그린 것을 순우 정미(丁未, 1247)년 왕치원(王致遠)이 사천에서 얻어 돌에 새겼다고 기록돼 있다. 천문도는 '소주천문도(蘇州天文圖)' 또는 '순우천문도(淳祐天文圖)'로 불리며 1247년 완성됐다. 소주천문도에는 중국에서 볼 수 있는 사계절 별이 모두 새겨져 있으며, 이는 동양의 별자리 체계를 갖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천문도이다.

소주천문도에 담긴 이야기

   

소주천문도에는 가로 108cm, 세로 216cm, 두께 22cm 크기의 돌에 성도

와 설명문이 새겨져 있다. 둥근 모양의 성도에는 별자리와 주극원, 적도

, 황도

그리고 지평선과 선으로 그려진 은하수가 새겨져 있다. 주극원은 1 년 내내 별을 볼 수 있는 영역으로 관측자의 위도

에 따라 천문도 상에서 그 크기가 달라진다. 주극원과 적도의 크기를 이용해 천문도를 제작한 관측자의 위도를 확인한 결과, 소주천문도를 제작한 위도는 북위

34.5° 북송(北宋)의 수도였던 개봉의 위도와 일치한다.

성도의 아래쪽에는 당시 천문지식을 적은 설명이 적혀 있다. 설명문은 총 2,140자로 쓰였으며, 북두칠성이 가리키는 땅의 방위를 설명한 12진과 해와 달이 만나 머무는 12차 그리고 12진과 12차가 만나는 12분야의 지명이 적혀 있다. 또한 당시의 우주구조론인 혼천설

을 시작으로 여러 천문 지식이 쓰여 있으며 부분적으로 임금의 바른 정치가 천체 운행에 미치는 영향 등 비과학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하지만 설명문의 대부분에는 해와 달의 운행이 수치적으로 제시돼 있고 음력에 따라 달의 모양이 다르게 보이는 이유, 일식월식이 발생하는 원리 등 당시에 이해하고 있던 천체의 운행원리가 과학적으로 설명돼 있다.

동양의 별자리, 3원 28수

소주천문도에는 1,443개의 별이 동양의 전통방식인3원 28수 별자리 체계로 그려져 있다. 동양의 별자리 체계는 별자리 구성이나 연결모양에서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서양식 별자리와 완전히 다르다. '3원 28수'는 하늘에 보이는 사계절의 별을 북극 근처의 세 영역인 3원(자미원, 태미원, 천시원)과 바깥쪽의 28개 별자리 영역인 28수로 나눈 것이다. 자미원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서양식 별자리인 용자리큰곰자리의 일부를 포함한다. 태미원은 사자자리머리털자리 근처에, 천시원은 뱀주인, 헤르쿨레스자리 근처에 해당한다. 28수 별자리는 동서남북 하늘 방향에 따라 각각 7개씩 나뉜 것으로, 주극원 바깥쪽의 방사형 선들이 28수의 영역을 표시한다.

   

국보 228호 천상열차분야지도의 탁본.

<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우리나라의 천상열차분야지도

조선 태조 4년(1395년)에 제작된 국보 228호 우리나라의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돌에 새긴 석각천문도이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동양의 전통적인 천문지식과 별자리 체계를 기초로 만들어져 동양의 대표할만한 천문도 중 하나다. 유래에 따르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고구려 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소주천문도와 비슷한 점도 많지만 몇 가지 다른 특징을 갖는다.

첫째, 소주천문도의 제작 위도는 북위 34.5°(북송의 수도인 개봉의 위도)인 반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제작 위도는 북위 38°(조선 한양의 위도)다. 둘째, 성도의 별을 살펴보면 소주천문도에는 모든 별이 같은 크기로 새겨져 있지만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1,467개의 모든 별이 밝기에 따라 다른 크기로 새겨져 있다. 셋째, 두 천문도에는 각각 고유하게 그려진 별자리가 있고 별의 위치와 연결이 달라 별자리 모양이 다른 것도 있다. 은하수의 위치와 모양도 다르게 새겨져 있다. 또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성도 바깥에는 중국 고대의 12차가 아닌 서양식 황도 12궁이 새겨져 있다. 전체적인 천문도 구성 차이 외에도 천상열차분야지도에는 천문도의 유래(고구려 시대)와 제작자, 혼효중성(초저녁과 새벽에 정남쪽 하늘에 위치하는 별), 28수 각각의 대표 별들의 북극에서부터 떨어진 거리 등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각천문도인 소주천문도는 우리나라의 천상열차분야지도와 함께 동양의 대표 전통 천문도다.

소주천문도의 성도에는 별자리와 주극원, 적도, 황도, 지평선, 은하수가 새겨져 있다.

  • 비각(碑刻)
    글이나 그림을 새긴 비석.
  • 성도(星圖)
    별 그림.
  • 적도(赤道)
    지구의 적도와 천구가 만나는 선.
  • 황도(黃道)
    천구에서 태양의 궤도.
  • 위도(緯度)
    지구 위의 위치를 나타내는 좌표축 중 가로선.
  • 북위(北緯)
    적도로부터 북극에 이르기까지의 위도.
  • 혼천설(渾天說)
    고대 중국의 천문학적 우주관으로 우주는 하늘이 땅을 둘러싼 모습으로 되어 있다는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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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해가 뜬다", "해가 진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 태양이 움직여서 해가 뜨고 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광활한 우주에 태양계가 있고 태양계 중심에 있는 태양의 주위를 지구가 도는 것이다(지동설). 하지만 약 1,500년 동안 인류는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천동설)'고 믿었다. 이 믿음의 중심에 그리스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Klaudios Ptolemaeos, 85?~165?)가 있다.

천동설에 의거해 지구를 중심으로 복잡한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수성과 금성을 나타낸 그림. 궤도 운동 후 행성은 자기 자리로 돌아온다.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천동설을 기반으로 [알마게스트]를 지은 프톨레마이오스.

   

프톨레마이오스는 천동설을 주장한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천문학뿐 아니라 지리학, 점성술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그가 오늘날까지 유명한 천문학자로 기억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집필한 한 권의 책 때문이다. 그는 고대 그리스와 바빌로니아의 천문학 이론을 저서 [알마게스트(Almagest, 아랍어로 '가장 위대한 책')]에 담아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지동설을 주장하기 이전까지 약 1,500년 동안 위대한 천문학자로 존경 받았다.

[알마게스트]에 쓰인 행성

들의 위치 계산이나 천문 계산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 수학적 정밀성은 천문학자뿐 아니라 점성술가와 항해사의 요구도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였다. 행성들의 타원 운동은 물론 지동설조차 몰랐던 당시 상황에서 행성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계산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이외에도 그는 대기에 의한 빛의 굴절

작용, 등속으로 움직이지 않는 달의 운동도 발견했다.

   

천동설을 기반으로 한 [알마게스트]

[알마게스트]에는 주로 그리스 천문학자 히파르코스(Hipparchos, BC190~BC120)의 연구 실적을 기본으로 천동설에 의한 천체 운동이 수학적으로 기술돼 있다. 총 13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첫 2권에는 천동설에 대한 설명과 히파르코스의 사인

함수표가 수록돼 있다. 3권부터는 히파르코스의 삼각법

과 수식을 이용해 해와 달, 행성의 위치 및 천문현상이 설명돼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본인이 만들었던 일식

과 월식

예보방법도 자세히 기술돼 있다. 별의 밝기를 6등급으로 나누는 히파르코스의 방법 역시 이 책을 통해 알려졌으며 1,000개가 넘는 별의 위치와 밝기를 기록한 별 목록도 수록됐다. 수록된 48개의 별자리는 당시 알렉산드리아 하늘에서 관측할 수 있는 별로 구성됐으며 남반구의 별은 포함되지 않았다.

천동설이란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과 달, 그리고 오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 고유의 궤도를 가지고 돌고 있다는 우주관이다. 역사시대 이래로 천동설은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고대 그리스에서 프톨레마이오스가 기하학, 수학적으로 해석해냈다. 게다가 중세에는 신학적인 권위까지 보태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우주의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전통적인 천동설로는 행성들의 역행과 해와 달, 행성들의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프톨레마이오스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지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공전의 중심으로 하는 큰 원을 정해 이심원으로, 그 이심원을 따라 도는 일정한 크기의 원을 주전원이라고 정한 것이 그것이다.

이심원과 주전원을 도입해 설명한 천동설.

   

행성들은 주전원을 따라, 주전원의 중심은 이심원을 따라 일정하게 돌게 하면 지구에서 볼 때 행성들은 순행과 역행을 번갈아 하면서 공전하게 된다. 또한 지구를 이심원의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두면서 해와 달, 행성들의 공전 속도가 일정하지 않은 까닭을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은 천체의 운동을 역학적으로 설명하기 보다는 정밀한 관측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했다. 관측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짜맞추는 과정에서 설명이 복잡해졌고 그 중에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천문서 [알마게스트]

   

[알마게스트]는 이전까지 막연했던 천동설을 수학을 바탕으로 정밀하게 설명한 천문학 책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천문학 집대성(Astoronomias, the Great Syntaxis of Astronomy)'이었는데 책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아랍어로 '가장 위대한 책'이란 뜻의 '알마게스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원래 그리스어로 집필됐던 책은 아랍어 사본으로 널리 알려졌다.

천동설을 기반으로 한 [알마게스트]가 널리 쓰이면서 지동설이 나오기 전까지 천동설은 천문학 체계로 가장 많이 채택됐다. 12세기 라틴어로 번역된 [알마게스트]는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쇠락한 유럽의 천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유럽은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알마게스트]를 이해할 수 있는 천문학자가 나타날 정도로 천문학이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알마게스트]를 토대로 발전한 유럽 천문학계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등장하게 됐다.

   

가장 영향력 있는 천문서 [알마게스트]의 번역본 본문 모습.

   

이렇듯 [알마게스트]는 천동설을 기반으로 쓰여졌으나 유럽 등 여러 지역에 퍼져 천문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며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하며 천동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지동설은 [알마게스트]를 기반으로 발전한 천문학계에서 탄생했으니, 이 책이 지동설의 밑거름이 된 셈이다.

  • 행성(行星)
    중심 별의 강한 인력의 영향으로 타원 궤도를 그리며 별의 주위를 도는 천체.
  • 굴절(屈折)
    빛, 소리 등이 한 매질에서 다른 매질로 들어갈 때 경계 면에서 진행방향이 바뀌는 현상.
  • 사인(Sine)
    직각 삼각형의 빗변과 한 예각(90˚보다 작은 각)을 마주보는 변의 비율.
  • 삼각법(三角法)
    삼각형의 변과 각의 관계를 기초로 한 기하학적 도형의 양적 관계.
  • 일식(日蝕)
    태양이 달의 그림자에 가려 전부나 일부가 보이지 않는 현상.
  • 월식(月蝕)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 전부나 일부가 보이지 않는 현상.
  • 공전(公轉)
    한 천체가 다른 천체의 둘레를 주기적으로 도는 일.

    이태형 / 충남대 천문우주학과 겸임교수

       

    원본 위치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933&path=|453|491|&leafId=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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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포퍼

상태와 변화2016. 10. 24. 16:09

열린사회를 꿈꾸는 비판적 합리주의자 -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

"20세기 전부를 살았던 철학자"

오래 산다는 것은 철학자에게도 행운이다. 포퍼(Karl R. Popper:1902~1994)는 1902년 오스트리아 빈(Bien)에서 태어나서 1994년 영국 런던 근교의 시골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20세기 전부를 살다 간 셈이다. 긴 생애 동안 그는 비약적인 과학 발전의 시대이자 탐욕과 독선으로 빚어진 전쟁으로 가득 찬 20세기 전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철학자의 임무가 세계를 전체적으로 바라보고 시대의 근본 문제를 진단하여 바람직한 대안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것이라면, 포퍼는 이 점에서 대단한 행운아였다. 한 세기 전부를 체험 속에서 진단하고 이 것이 검증되는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20세기 초반에 내린 과학과 사회에 대한 진단은 정확한 것이었고 세계를 개선하는 데 기여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개인으로서의 그의 삶은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20세기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겪지 않았어도 될 고통으로 말이다.

"탈퇴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입한 죄"

포퍼가 태어난 1902년 당시의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아버지는 개종한 유태계 법률가로 빈 사회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다. 무척 학구적이어서 그리스 로마 고전을 독일어로 옮기는 것이 취미였고 자선 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 했다고 한다. 포퍼는 '부엌을 빼고는 어디든 책이 꽂혀 있는 집안(무려 만 권이 넘는 장서가 있었다 !)'에서 아버지의 장서들을 탐독하며 안락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포퍼가 그보다 50년만 전에 태어났어도 그는 유복하고 편안하게 세상을 살아갈 팔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세상은 한 순간에 바뀌었다. 물자가 부족해졌고 서로 다른 사상과 민족에 대해 관대했던 제국의 이념은 흐려졌다. 빈곤층이 늘어날수록 사회 부(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유태인에 대한 증오는 점점 더 커졌다. 포퍼 집안은 이미 유태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지만 그들을 같은 '제국 시민'으로 보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유태인이란 사실이 저주 같던 시기, 유태계였던 포퍼는 '어떻게 해도 탈퇴 할 수 없는 클럽에 가입한 것 같은 상황'이었다. 1945년,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40세가 넘을 때 까지도 유태인에 대한 박해는 그의 삶을 줄곧 일그러뜨렸다.

   

"열린사회를 꿈꾸게 한 혼란과 빈곤"

1918년, 제국이 패전하고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자 포퍼 집안의 가세(家勢)는 완전히 기울어졌다.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아버지의 재산이 한 순간에 날아가 버린 것이다. 포퍼는 고등학교 졸업 시험도 보지 못한 채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열여덟 살 때에는 아버지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 군대 막사 같은 학생 기숙사로 거처를 옮긴다. 빈약한 체구에 체력도 약했지만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타고난 학구열만은 버릴 수 없었다. 빈 대학의 청강생 자격으로 아인슈타인의 강연을 들은 것은 이 무렵의 일이다.

   

당시 지식인 젊은이들이 보통 그렇듯이 포퍼도 마르크스(K.Marx:1818~1883) 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의 만연한 고통과 불평등의 근본 원인을 가진 자들이 못 가진 자들을 착취하기 때문으로 본다. 정부는 권력과 돈을 움켜쥔 소수, 즉 부르주아들이 다수의 인민들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 즉 프롤레타리아들이 힘을 합쳐 일어나 부르주아들을 폭력으로 쫓아내야 한다. 그 때에만 모두가 평등하고 인간다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

   

포퍼도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보여준 명쾌한 자본주의 분석과 급진적 사회 개혁론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어느 날 시위 도중에 어느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는 고민 끝에 생각을 바꾼다. 아무리 좋은 목표와 명분이라 해도 개인들을 역사의 희생양으로 무가치하게 파멸시킬 수 있는 이념이라면 올바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포퍼의 사상은 항상 전체보다는 개인을, 청사진(靑寫眞)에 기댄 혁명보다는 다수의 동의에 기초한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한다. 이는 절대적인 이념과 정의로운 명분을 내세우는 전쟁과 혼란이 오히려 사람들을 부정의와 고통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음을 포퍼 스스로 젊은 시절에 체험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증가능성-불완전해야 완전하다."

극히 불안한 시대 상황과 생계 걱정 속에서도 포퍼는 학문적 경력을 계속 쌓여 갔다. 생계를 위해 목수(木手) 도제 수업을 받으면서도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치루고 빈 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했다. 쇤베르크의 '개인음악 연주 협회'에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상류 사회에서의 관습과 하층민의 생계 걱정이 일상에서 교차하는 불안한 시기였던 것이다.

1925년, 스물세 살의 포퍼는 사범학교에 진학한다.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한 그에게 이는 진학을 위한 전기가 되었다. 4년 뒤에는 빈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듬해에는 중등학교 수학 및 물리학 교사 자격을 얻어 1930년에는 마침내 고등학교 교사로 자리 잡게 된다.

그가 교단에 선 1930년의 세상은 온통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듯이 보였다. 미국의 증권시장이 붕괴되었고 독일의 실업자 수는 500만을 넘어섰다. 더욱더 강해지는 유태인에 대한 반감이 포퍼의 목줄을 죄어 왔다. 과학 철학의 역사를 바꾸어놓았다고 평가 받는 "탐구의 논리"는 바로 이 시기에 쓰여 진 작품이다.

"탐구의 논리"가 완성될 무렵 빈의 거리는 벌써 나치 표장을 하고 있는 젊은이들에 의해 점령당하고 있었다. 어느 날 나치 완장을 두른 젊은이와 나눈 대화에서 포퍼는 큰 충격을 받는다.

   

"...나하고 논쟁하고 싶다구? 난 논쟁 따위는 하지 않아. 그 대신 총을 갈기지."

포퍼의 철학은 자기 이념에 확신에 차서 반성할 줄 모르는 이 젊은이에 대한 반론 같은 느낌을 준다. 무엇이 과학적인지 아닌지를 다루는 "탐구의 논리"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포퍼에 의하면 이론은 '반증가능성(Falsiability)'이 있을 때에만 진정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주장이 틀릴 수 있음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 때에만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천문학자들은 혜성의 움직임을 예측하기 위한 가설을 제안할 수 있다. 점성술사도 마찬가지로 그들 나름의 논리를 내세워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천문학을 '과학'이라 하지만 점성술은 '미신'이라 부른다. 둘 다 정교한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고 (제대로 된 점성술자가 되기는 천문학 박사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별의 움직임을 상당수준까지 정확히 맞힐 수 있다.게다가 '별 점'은 맞는 경우도 꽤 많다. 반대로, 육안으로 직접 별을 관찰해 본 사람이라면 천문학의 예측이 실현되는 것을 경험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음을 알 것이다. 그럼에도 왜 천문학은 과학이고 점성술은 미신에 불과할까?

포퍼의 '반증가능성'은 이 것을 설명하기 위한 개념이다. 미신, 혹은 사이비 과학(Pseudo-Science)은 예측이 틀릴 경우나 맞는 경우나 객관적인 토론과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컨대 혜성의 궤도가 예측과 어긋났을 경우, 태양 인력의 영향을 고려하지 못한 계산 결과라는 과학자들의 반론에는 다른 증거를 들이대며 재반론을 펴는 등 객관적인 토론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곰 자리가 처녀자리 보다 강해져서 그렇게 됐다는 점성술가의 설명에 대해서는 토론을 붙여봐야 납득할 만한 결론을 얻기 힘들다.

이처럼 사이비 이론들은 반증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과학적 일 수 없다. 과학은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하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틀릴 수 있고 (반증 가능하고), 또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성장 발전하며 좀더 올바른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부단한 토론과 이성적인 반증하는 가운데서 과학은 성립한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

1934년 첫 출간된 "탐구의 논리"는 식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1959년 이 책이 "과학적 발견의 논리(Logic of Scientific Discovery)"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을 때의 폭발적인 인기에 비하면 '세 발의 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유태계 사람들에게는 대학으로 진출하여 학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다. 게다가 나치의 탄압은 점점 더 노골적이어서 독일로 합병된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1937년, 35세의 포퍼는 당시에는 '달나라 다음으로 먼 곳'이었던 뉴질랜드 크리스트 처치의 켄터베리 대학의 교수직을 얻어서 떠난다.

그에게 교수직 추천장을 써 준 이들은 아인슈타인, 러셀, 무어, 카르납 등 당대 최고 스타급 학자들이다. 연구물이라곤 저서 한 권 정도였던 젊은 고등학교 선생에게 거물급 학자들이 선뜻 추천서를 써주었던 것을 보면 젊은 포퍼의 잠재력이 얼마나 높이 평가받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겠다.

포퍼는 이 곳에서 제 2차 세계대전이 1945년 종전될 때까지 지낸다. 그러나 미처 탈출하지 못해 오스트리아에 남은 친지들은 대부분 온전치 못했다. 외가 쪽 친척 16명이 홀로코스트 때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달나라만큼 먼 곳'에 있는 그가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란 비참한 현실에 대항하여 글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역사주의의 빈곤"은 이런 노력의 결과이다.

'열린사회'는 '닫힌사회'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닫힌사회에서 사회의 도덕과 법률은 마치 자연법칙과 같이 절대적인 것이어서 비판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닫힌사회는 역사란 법칙에 따라 어떤 목표를 향해 발전한다는 역사주의에 기초해 있다. 국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역사에 있어 올바른 방향을 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빠져있는 개인들은 그렇지 못하다. 오직 국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해야 한다. 그리고 대화보다는 힘에 우위에 의한 폭력과 제재가 효과적인 설득 수단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열린사회에서는 도덕과 법률을 필요에 따라 언제든 변경할 있는 약속과 같은 것으로 본다. 또한 열린사회는 역사를 정해진 방향에 따라 발전해 가는 것으로 보지 않는다. 역사는 사람들 사이의 수많은 토론과 시행착오를 통해 점차 개선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의 경험 부족 때문에 많은 혼란과 실수가 일어나지만 토론을 통한 길고 지루한 세세한 조정들을 거쳐 오류는 점차 제거되며 사회는 발전하게 된다고 믿는다.

열린사회에서는 개인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비판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믿음에 기초해 있다.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 그러나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인류는 발전할 수 있다. 불완전하기에 "내가 틀리고 당신이 옳을 수도 있으며 노력에 의해 우리는 진리에로 좀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고 믿고 서로의 뜻과 자유를 존중할 수 있는 사회제도를 필요로 하게 되기 때문이다. 자유와 평등은 이런 믿음 속에서 성장해 나간다.

열린사회는 닫힌사회와 같이 이상과 계획에 따라 개인들을 강제하고 희생시키면서 사회전체를 개선하려고 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열린사회는 '점진적 사회공학'을 추구한다. 개인들이 이성에 의해 스스로 판단하며 사회의 지배적인 견해에 대해 반대의견을 낼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 사회는 비로소 점진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 마르크스주의 등 온갖 거창한 이론들이 자신들의 장밋빛 이상에 심취 해 인류를 파멸로 몰아놓고 있던 시대에 포퍼의 열린사회 주장은 분명 전체주의자들의 폭력에 맞서는 합리적인 이론이었다.

   

"포퍼가 열린사회의 적?"

1946년, 전쟁이 끝나자 포퍼는 영국 시민권을 얻고 런던 경제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유럽으로 돌아온다. 1969년 퇴임할 때까지 계속 이 대학의 교수로 있었다. "탐구의 논리"와 "열린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로 포퍼는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존경받았다.

종전 후 다시 소련,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국가'라는 '닫힌사회'가 등장하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맞서게 되자 이번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이 그들에 대한 비판서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더 명성을 얻었다. 이 왜소한 체구에 오스트리아 출신 망명자는 63세에는 영국 여왕에게서 기사작위를 받았다. (그는 영국에서 포퍼 경(卿)으로 불린다.) 많은 국가원수들이 영국을 방문할 때면 그에게 찾아가려고 했고 방문자 명단엔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있었다. 일본천황도 그를 초대했던 적이 있다.

90세가 넘는 생애와 '열린...'의 어감 때문에 포퍼라고 하면 부드럽고 자상한 노인의 이미지를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는 자기주장에 대한 반대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무척 불같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떤 학자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열린사회의 적'에 의해 쓰여 졌다고 비꼴 정도였다. 그는 '논쟁을 위한 싸움 닭' 같았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선뜻 질문을 잘못했다가는 '개망신'을 당하기 일 수였고 상대가 상당한 석학일 경우에도 예외는 될 수 없었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그와 논쟁을 벌이던 중에 부지깽이를 휘두를 정도로 흥분했었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유명한 일화다. 비트겐슈타인도 '한 성격'하는 사람이었지만 포퍼도 못지않았으니 결과는 어찌 보면 너무 당연한 듯도 싶다.

그러나 포퍼의 과격함은 학문의 장에서만 그랬다. 일상에서 포퍼는 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친구도 많았고 그가 학생들을 좋아했던 것만큼이나 학생들도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연구를 위해 외딴 곳에 집을 얻어 아내와 은둔하며 지냈지만 말년의 포퍼의 모습은 양녀의 가족과 여행을 떠나고 손자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등 여느 행복한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포퍼 철학의 영예로운 은퇴"

1994년, 포퍼의 죽음이 보도되었을 때, '아직도 포퍼가 살아있었어?'라고 의아해 했던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필자도 그중에 한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열린사회와 그 적들"과 "탐구의 논리"는 이미 1950년대부터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었기 때문이다.

포퍼는 20세기의 가장 대표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그러나 그의 명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포퍼의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다. 열린사회의 가장 대표적인 적이었던 전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그의 생전에 이미 몰락했다. '반증가능성'과 '점진적 사회 공학'의 이념은 이제 우리에게는 상식에 속한다. 그의 철학에 대해서는 쇠퇴한다기보다 임무를 다해 영예롭게 은퇴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싶다.

그러나 포퍼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열린사회 주장은 현실에 존재하는 닫힌사회들에 오히려 도움만 주고 있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일이 합리적 대화로만 해결되지는 않는다. 약자들이 강자의 권력과 기득권에 맞서 자기주장을 합리적으로 내세워 '점진적으로 사회를 개선 한다'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포퍼가 자본가들의 옹호자로 평가받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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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안광복(중동고 철학교사)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글은 "고교독서평설(지학사)" 2003년 3월호에 실렸던 것이며, 상업적 이용에 관한 권리는 지학사에 있습니다.

[출처 : eea -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 http://cafe.daum.net/eea]

   

원본 위치 <http://cafe354.daum.net/_c21_/bbs_read?grpid=1BVWP&mgrpid=&fldid=JT1C&page=1&prev_page=0&firstbbsdepth=&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0s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54&listnum=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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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과 질서

상태와 변화2016. 10. 24. 16:08

일리아 프리고진 [질서와 혼돈]

   

1. 작가 소개

일리아 프리고진(I. Prigogine) 1917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1922년 가족과 함께 베를린으로 갔다가 나치의 대두를 보고 브뤼셀로 옳긴 벨기에의 과학자이다. 그는 브뤼셀 대학을 졸업 후 1941년 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51년부터 이 대학에 교수로 있으며, 물리학화학 연구소장 및 텍사스 대학 통계열역학센터 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비가역과정(非可逆過程)의 열역학을 체계화하고, 산일구조(散逸構造)의 개념을 제출하여 거기서부터 요동을 통한 질서형성을 연구하는 등, 비평형개방계의 물리학화학을 일관적으로 추구하였다. 비평형열역학의 기본을 이루는 산일함수를 체계화한 업적으로 1977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다.

   

2. 책의 소개

우리들의 세계 개념은 우리가 자각하고 있는 것보다 물리학으로부터 매우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뉴턴과 그의 역학의 계승자들은 우주를 예측할 수 있는 일정한 규칙에 따르는 시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한 인식에 따르면 정치, 경계 혹은 심리학마저도 일정한 법칙의 지배하에 있다. 즉 우리를 통치하는 자를 위대한 시계 직공처럼 인정하는 것이 된다.

일리아 프리고진은 우주의 기계론적 견해에 과학성이 전혀 없다고 말한다. 17세기에 만들어진 뉴턴 이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학교에서 아직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에야말로 확률에 바탕을 둔 현대 물리학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질서가 있는 듯이 보이는 것도 본질적으로 불확정한 혼돈에 불과하다. 현세는 시계나 시계공과 같은 것이 없다. 세계는 우발적이며, 혼돈스럽고 예측 불가능이다. 그래서 그는 물리학도 인문과학처럼 우연의 총화(總和)가 된다고 말한다.

   

3. 읽어보기

(1)우주는 이젠 시계가 아니라 혼돈이다

학교에서 태연히 가르치고 있는, 고전적 모델에 의하면, 우주의 법칙은 단순하고 대칭성(對稱性)을 가지고 있으며 결정론적이다. 그러고 가역성(可逆性)이 있다. 시계는, 예측할 수 있는 일정한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뜻에서, 우주의 상징적인 표현이 된다. 이 도시에서는 물질이 법칙에 따르지만, 인간은 그와 반대로 자유이다. 이것은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적 입장이며, 서양 철학의 특징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역사나 심리학과 같은 인문 과학과 정밀 과학을, 우리들의 문화가 구분하게 되었다. 전자(前者)에서는 시간과 사상(事象)이 본질적인 역할을 하고, 후자에서는 법칙이 시간을 초월한다.

1920년대의 초기에 과학계는 이 도식이 양자 역학에 의해 변혁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전자의 영역에서 고전물리학이 효력을 얻지 못하고, 우리들은 불확실한 세계로 들어간 셈이다.

물질의 구조는 결정론적 법칙이 아니라 확률 모델에 의해서 확정되게 되었다. 처음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들이 신봉하는 결정론의 우주에 섭동(攝動)이 인정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의 측정에 의해 생겼다는 해석이 압도적이었다. 불안정을 일으킨 것은 관측자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20세기 말엽의 현재, 물질은 불완전하며, 불변하다고 믿어 왔던 우주에도 역사가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알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물리학의 세계는 시계가 아니라, 예상할 수 없는 혼돈이다!>고 그는 주장한다.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인 연쇄(連鎖)를 기본으로 하는 결정론적인 학설은 모두, 확률 계산으로 차츰 자리바꿈이 된다. 분명히 약 5백만 년 후의 지구의 위치를(뉴턴 학파의 고전적 도식을 바탕으로) 예언할 수 있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 안정된 주기운동이 예외에 속한다는 것도 판명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동력학(動力學) 체계는 불안정하다. 프리고진은 눈에 띄는 단순한 한 예로서 기상학을 들었다.

   

(2) 나비()의 효과는 자연을 예측 불허로 만든다

프리고진은 의문을 던진다. 지난 1세기 동안 혜성(慧星)의 통과는 예측할 수 있는데, 어째서 다음주의 기후를 예측할 수 없느냐고.

기상관(氣象官)은 완전한 예측을 세워도 기껏해야 4일 미만의 예보밖에 할 수 없다. 개량된 관측기기를 손앞에 둔다면, 1주일 후나 1개월 후의 일기예보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세론(世論)은 믿고 있다. 그것은 잘못이다. 기후는 본질적으로 예측 불능이다. 불확실한 사상(事象)을 총계한 결과인 것이다. 결국 이것도 불안정한 동력학(動力學) 체계에 속한다. 그 의미는 지구의 어느 한 곳에서 극히 작은 변동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나비의 효과"라고 부른다. 북경에서 나비의 날개짓으로 가벼운 미풍이 생기면 그 바람이 전해져서, 캘리포니아에 태풍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프리고진의 학설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기본적인 예로, 화폐 이야기가 있다. 동전을 던져서 안 쪽이냐 바깥 쪽이냐를 맞추는 게임을 해 보면, 동전이 떨어졌을 때에 나오는 면은 안이나 바깥이나 같은 빈도이다. 가령 컴퓨터를 사용해서 동전 운동의 전 단계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3)프리고진은 '계산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동전은 반드시 불확실한 영역, 면이 바꿔는 영역을 통과해야 되기 때문에 불안정한 동력화 체계에서는 '안'이 나올 것 같은 최초의 조건과 '바깥'이 나을 것 같은 최초의 조건이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성서에 기록된 역사의 유명한 예를 빌려 보자. 요셉이 고대 이집트 왕에게 예언한 일곱 마리의 살찐 암소 뒤에, 말라빠진 일곱 마리 염소가 나타나는 이야기이다(구약성서 창세기 제41). 나일강의 증수(增水)는 수천 년 전부터 측량되어 왔다.

컴퓨터로 분석하면 그 증수는 예측불능이며, 당연하게도 혼돈하게 되어 있다. 증권거래소의 현상도 '나비의 효과'와 동질이다. 예를 들어 도쿄(東京)의 증권 거래소의 작은 증권 거래량이 뉴욕에서의 전면적인 대폭락의 방아쇠가 될 수 있다. 이 대폭락도 역시 당연하게도 예측 불능이다.

이러한 에피소드에서 보면 (이 밖에도 설득력있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지만 프리고진은 삼가고 있다) 결정론적인 세계관은 끊어져 간다. 요컨대, 우연성은 물리학적 현실의 불가능한 일부이다. 물질에는 생명과 같이 사상(事象)에 좌우되는 성질이 있다. 아인슈타인이 믿고 있던 것과는 반대로 프리고진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한다'고 생각한다

   

(4)질서는 어떻게 혼돈에서 생긴 것일까

결정론적 법칙에 대신하여 우연성이 편재(遍在)하는 데 관해서 학자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가?

프리고진은 경탄스럽다고 대답한다. 혼돈이, 역시 질서 있는 구조로 귀착되는 데에 학자는 놀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미 가장 놀랄 만한 일은 이 대우주 속에서 우리들이 얼마만큼의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라고 말했다.

혼돈에서 태어난 질서라는 프리고진의 표현은 근대과학을 가장 잘 요약하고 있고, 모든 전문 분야에 통용된다고 한다.

그는 특히 물리화학 분야에서, 이른바 산일구조(散逸構造)를 발견했다. 산일구조는 결정과 같은 폐쇄적인 평형계의 질서와는 반대로, 외계와 에너지나 물질을 끊임없이 교환하는 개방계에서는 정적(靜的)인 평형 상태를 얻지 못하고, 동적인 질서를 갖는 정상상태(定常狀態) 혹은 시간적으로 지속되는 진동상태(振動狀態)가 만들어지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거시적(巨視的)인 질서 구조를 가리킨다. 화학적인 비평형 상태는 반드시 무질서로 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완전히 질서 잡힌 조직이나 구조를 자연 발생적으로 출현시킨다. 이 구조를 산일(散逸)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구조가 앞 조직과 대체되는 데 있어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 산일하기 때문이다.

그는 전통적인 물리학이 질서와 평형구조를 같은 것으로 간주했다.

이 개념의 모델은 결정이다. 반대로 비평형 상태를 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비평형 상태가 질서나 무질서에 모두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분명히 추상적이지만 본질적인 사항이다. 왜냐하면, 우리 우주 전체는 혼돈, 질서, 혼돈, 질서라는 모델에 바탕을 두고 기능하고 있으며, 그 단계마다 대량의 에너지를 소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5) 일반 원리로서의 혼돈

그런데, 물리화학 반응의 차원에서는 그것이 진실이고 검증할 수도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과연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인가? 비평형 구조는 보편적이고 새로운 원리인가, 아니면 단순한 음유(陰喩)인가? 최초의 혼돈에서 태어난(150억년 전의 폭발에 의함) 우리 우주는 은하와 혹성으로 구성되었다. 자연 선택의 우발성(偶發性)에서 생긴 생명마저도 점점 조직화되고, 복잡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경제도 이 모델에 맞추어서 기능하고 있다고 한다. 종합되지 않은 별개의 활동의 모임에서 사회질서와 경제의 진보가 나타난다. 나라들의 운명도 파란을 겪으면서, 대규모적인 변동(군중의 움직임변동)을 거쳐, 언젠가는 새로운 사회 질서에 이르고 그 사회는 거듭 에너지 자원을 필요로 하게 된다.

'혼돈'의 사회적 분석과 정치가의 일반적 연설과의 사이에 큰 틈이 있는 데에 대해서 프리고진은 주의를 촉구한다.

정부의 말은 정말로 상황을 충분히 장악하고 있으며, 올바른 레버를 누르기만 하면 기대하는 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들린다. 이와 같은 정치 속에다 판단을 가두어 두고 있기 때문이다. 교육이 종합적으로 뒤졌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시계처럼 예측 가능한 우주라는 관점은 '프리고진의 모델'과는 항상 상반된다.

그 실례는 얼마든지 떠올릴 수 있다. 사라예보의 테러행위에서 발발한 1914년의 제1차 세계대전은 '나비 효과'의 가장 적절한 예증(例證)이 아닌가?

좀더 가까이로는 1987 10월의 주식 대폭락의 관한 뉴턴학파의 결정론적 설명을 그는 비웃는다. 전문가의 말을 빌린다면, 시세의 저락(低落)은 달러 값이 떨어진 데서 발생했다. 달러 값의 하락은 미국의 무역 적자의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나비 효과'의 하나이다. 딴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폭락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금융 전문가도 있었는데 그건 단순히 우연히 적중한 데 불과하다.

   

4. 생각하기

프리고진에게는, 질서가 혼돈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그러나 과학 모델을 이와 같은 사회적 이론으로 이행(移行)시키려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

   

원본 위치 <http://cafe354.daum.net/_c21_/bbs_read?grpid=1BVWP&mgrpid=&fldid=JT1C&page=1&prev_page=0&firstbbsdepth=&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0i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4&listnum=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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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론

상태와 변화2016. 10. 24. 16:08

   

원자핵을 구성하는 입자는 양성자와 중성자이다. 중성자

1932년이 되어서야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원자핵이

양성자로만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었다. 원자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은 원자핵 속에 들어 있는 양성자의 수이다.

양성자 하나로 이루어진 원자핵을 가지고 있는 원자는

수소이다. 산소 원자핵은 8개의 양성자를 가지고 있고

탄소 원자핵은 6개의 양성자를 가지고 있다. 양성자의

수를 원자번호라고 한다. 보통의 원자는 양성자와 같은

수의 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양전하나 음전하를 띤

이온은 전자의 수가 양성자의 수보다 약간 많거나 적다.

   

만물을 쪼개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가장 작은 알맹이인 원자가 남는다는 원자론은 1808년 영국의 돌턴(John Dalton, 1766~1844)에 의해「화학의 신체계」라는 책을 통해 처음 제안되었다. 그러나 원자가 실제로 존재하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던 당시로서는 원자론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수소와 산소가 화합하여 물이 된다는 것은 실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수소 원자 몇 개와 산소 원자 몇 개가 결합하여

물 분자 하나를 만드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화학반응에 참여하는 원자들의 수를 셀 수 있는 방법이 없는 한

분자의 조성식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따라서 원자론이 제안된 후에도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원자론을 받아

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화학 반응에 참여하는 원자의 수를 세는 방법을 제안한 사람은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 1776~1856)였다. 아보가드로는 1811년에 같은 온도 같은 압력 하에서 같은 부피 속에는 원자나 분자의 크기와 관계없이

같은 수의 알갱이가 들어 있다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제안했다.

만약 이 가설을 받아들인다면 부피의 비가 바로 알갱이 수의 비가 되어 화학반응에 참여하는 알갱이 수의 비를 알 수

있고 이것을 토대로 분자의 조성을 정확히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아보가드로(Amedeo Avogadro, 1776~1856)

   

그러나 화학자들은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같은 부피 속에 들어 있는 큰 분자나 작은 원자의 수가 같다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은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설처럼 보인다. 하지만 온도와 압력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이 가설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체의 부피는 기체 분자나

원자가 실제로 차지하는 부피가 아니라 그것이 활동하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체 분자나 원자 그 자체가 차지하는 부피는 전체 부피에

비하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따라서 분자나 원자의 크기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온도는 기체 분자나 원자 하나하나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크기를 나타낸다. 따라서 같은 온도에서는 모든 원자나 분자가

같은 에너지를 가지게 되고, 벽에 부딪혔을 때 벽에 작용하는 평균 힘이

같다. 그러므로 같은 온도에서 같은 압력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같은 부피

속에는 같은 수의 알갱이가 들어 있어야 한다. 즉, 같은 온도, 같은 압력,

같은 부피 속에는 같은 수의 알갱이가 들어있는 것이다.

   

열과, 온도 그리고 압력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19세기 초의 화학자들을 설득시켜 화학자들로 하여금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원자설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칸니차로(Stanislao

Cannizzaro, 1826~1910)였다. 1860년 9월3일에 카를스루에(Karlsruhe)에서 열렸던 최초의 국제 화학회의에서 제노바

대학의 교수였던 칸니차로는 아보가드로의 가설을 받아들이도록 화학자들을 설득했다. 칸니차로의 노력으로 화학자들은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화학을 크게 발전시켜 나갔다.

   

마하(Emst Mach, 1838~1916)

   

그러나 20세기가 되어서도 물리학자들 중에는 원자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우리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없는 것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확실하지도 않은 원자의 존재를 가정하지 않고도 여러 가지

물리적 성질을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스트리아의 빈 대학의 교수였던 마하(Ernst Mach, 1838~1916)는

그런 사람들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1895년부터 1901년까지

빈 대학의 과학철학사 주임교수직을 맡았던 마하는 음향학, 전기학,

유체역학, 역학, 광학 그리고 열역학 등의 분야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초음파 원리의 기초를 닦기도 했다.

마하는 소리의 속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는 물체는「소닉 붐」

이라는 효과를 낸다는 것을 밝혀낸 사람이기도 하다. 흔히 전투기

등의 아주 빠른 비행기의 속도를 나타낼 때 소리의 속도를 1로 하여

나타내는 것을 마하수라고 하는데 이는 그의 이름에서 따온 단위이다.

마하는 극단적인 실증주의의 지지자였고,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연과학에서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할 수 없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려고 하였고, 경험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개념을

적극 반대했다. 그는 과학은 관측된 현상을 기초로 일반화하는 귀납적인 바탕 위에서만 과학이 형성될 수 있다는 확신하고

있었다. 마하는 죽을 때까지 세상이 맨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원자와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분자나 원자를 통계적으로 다루는 방법을 정립한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은 마하를

정면으로 반대했다. 원자의 존재를 두고 벌어진 두 사람 사이의 적대감은 1895년에 볼츠만이 빈 대학의 이론물리학 주임

교수직을 사직하고 라이프치히로 옮겨갈 정도였다. 1901년에 마하가 오스트리아 국회의원에 지명되어 철학과 주임교수

자리를 사직하자 볼츠만은 빈으로 돌아와 마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볼츠만은 물리학 분야에 확률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이었다. 볼츠만은 고립된 물리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항상 최대의 엔트로피 상태를 향해 변해간다는 열역학 제2법칙은 통계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확률적으로 해석할 때 성립한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마하와 볼츠만은 원자가 물리적 실체인가 아니면 물리학자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가상적인 존재인가 하는 것을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마하는 물러설 줄 모르는 용감한 투사였지만 볼츠만은 그렇지 않았다. 볼츠만은 항상 수비하는 입장이었다. 1897년에 빈에서 열렸던 한 학술회의에서 볼츠만의 발표가 끝난 후 마하가 일어나서 큰 소리로 "나는 원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을 때도 그는 효과적으로 마하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마하와의 수 년 동안에 걸친 논쟁에 지친 볼츠만은 우울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1906년 9월 6일 트리티스 근처에 있는 두인노 만에서 부인과 딸이 수영을 하고 있는 동안 볼츠만은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 원자의 존재를 바탕으로 통계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성립시켰던 볼츠만의 일생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버렸다.

   

   

볼츠만(Ludwig Eduard Boltzmann, 1844~1906)

   

그러나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결정적인 논문이 그가 죽기 1년 전인 1905년,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사무소

서기에 의해 발표되어 있었다. 그 특허사무소 서기는 아인슈타인이었다. 그가 학술지 '물리학 연보'에 브라운 운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던 것이다. 액체 위에 떠있는 미세한 입자들의 무작위한 운동인 브라운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아인슈타인은 원자와 분자의 존재를 바탕으로 정교한 이론을 전개했고, 그 결과는 실험을 통해 확인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논문이 볼츠만을 구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아인슈타인은 아직 물리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논문에 주목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볼츠만이 죽은 후 원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차츰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이 원자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

1911년에는 러더퍼드가 원자핵을 발견했고, 원자보다 작은 수많은 입자들도 발견되었다.

   

그렇다면 원자보다 훨씬 작은 쿼크에 대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는 현대 과학에서 사용하고 있는 장비로는 원자를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물체의 표면을 이루는 원자와 탐침 사이에 흐르는 작은 전류를 측정하여 표면 상태를 알아보는 주사형 터널 현미경(STM)이나 표면 원자와 탐침 사이에 작용하는 힘을 측정하여 표면 상태를 알아보는 원자력 현미경(AFM)을 이용하면 원자의 배열상태를 직접 보는 것이 가능하다. 직접 관측할 수 없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티던 마하가 STM 혹은 AFM으로 찍은 원자 배열 사진을 본다면 어떤 표정을 할까? 그런 마하의 표정을 바라보는 볼츠만의 표정은 또 어떨까?

   

신소재 그래핀(graphene)의 사진. 개개의 탄소 원자(주황색)끼리 결합한

6각 격자 구조를 볼 수 있다. <출처: LB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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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안 마이클의 슈뢰딩거의 고양이입니다. 단 세 컷으로 양자역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고양이의 표정이 재밌습니다.

다음은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퍼온 슈뢰딩거의 고양이 설명입니다.

슈뢰딩거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로 양자역학을 서술하는 네가지 방법 중 가장 기초적이고 최초의 방정식을 고안해 낸 사람이다. 슈뢰딩거는 말년에 과학철학을 공부했는데 그가 내세운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만약 양자법칙이 거시세계에까지 확장된다면 어떻게 될까를 보여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고양이가 밀폐된 상자 안에 갇혀 있다. 상자 안에는 1시간에 2분의 1 확률로 1개 분해되는 알파입자 가속기가 있고 청산가리 통이 들어 있다. 만약 알파입자가 방출되어 청산가리 통의 센서가 감지하면 청산가리 통은 깨지고 고양이는 죽고 만다. 1시간 후 과연 고양이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알파입자는 미시세계의 것이고 양자역학으로 서술된다. 그것이 거시세계의 고양이를 죽이느냐 살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각 물리학적 입장에 따라 고양이가 죽었을까 살았을까에 대한 답변은 다르다. 고전역학자들은 실재론자들이며 우리가 그것을 확인하든 안 하든 고양이는 죽었거나 안 죽었거나이다.

   

1시간 후의 일은 어떻게든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은 관찰과 무관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양자론자들은 관측에 지배받는다고 이야기한다. 고양이는 죽었거나 살았거나이고 우리가 그것을 열어봤을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즉, 그것의 결과는 관측에 의존한다. 하나는 결정론적인 사고를 기초로 하고 있으며 다른 하나는 비결정론적인 사고를 취하고 있다. 양자역학에서 관측행위는 결과값에 항상 영향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가능세계론과 통계적 입장이 있다. 가능세계론은 기본적으로 확률에 의한 세계관을 받아들인다. 그들에 의하면 상자를 여는 순간 세계는 고양이가 죽은 세계와 죽지 않은 세계의 두 갈래로 나뉜다. 통계적 입장 역시 확률론을 받아들인다. 만약 어떤 이가 여러번 이 실험을 반복한다면 어떤 통계적인 값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양이가 죽을 확률이라는 것이다.

   

이 논쟁은 양자역학의 기초를 다져 오늘날 톱쿼크와 같은 물질 기본단위 연구의 길을 트는 동시에 철학사상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슈뢰딩거, 막스 보른, 오토 한 등 양자역학을 설명한 독일 괴팅겐대학교 교수들은 통근기차 속 토론에서 이런 복잡하고 심오한 이론체계를 확립했다고 한다.

   

원본 위치 <http://cafe354.daum.net/_c21_/bbs_read?grpid=1BVWP&mgrpid=&fldid=JT1C&page=1&prev_page=0&firstbbsdepth=&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0n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49&listnum=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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